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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내 머릿속에 가득찬 것들

커피와 코딩

나는 19살 수능을 치자마자 당시 동갑내기 여자친구의 집 근처에 있어서 자주 가던 카페에서 커피를 배우게 되었다. 그 땐, 아직까지 카페가 요즘 정도로까진 성행하진 않았고, 막 뜨기 시작하던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연히 배우기 시작한 그 곳에서의 커피는 지금의 나를 있게 하도록 큰 영향을 주었다.
커피를 배운 첫 날, 난 내심 바로 커피를 뽑아보는 것인가 기대를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때 배운 건 커피에 대한 이론적인 내용 몇 가지와 1잔의 에스프레소 시음, 그리고 한가지 질문이 전부였다.

그 질문은 “커피란 무엇인가” 라는 약간은 철학적으로도 해석되는 질문이었다. 스승님은 바로 답을 하지 않아도 되고, 나중에 한달이 지나서 다시 물어볼테니 그 때 대답해보라고 하셨다.

난생 처음 에스프레소를 마신 그 날을 아직 잊지 못한다. 아주 강렬하고 알 수 없는 짜릿함이 혀에 오래오래 남도록 저녁식사도 하지 않을 정도였다. (명탐정 코난이 범인을 알아차렸을 때 주변이 깜깜해지고 번개처럼 지나가는 그 빛 하나가 스쳐가는 느낌이라고 표현하고 다녔다.)

그 다음날도, 1주일 정도는 그렇게 커피와 관련된 재밌는 이야기와 지식들과 1잔의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지나갔다.

저녁에 친구와 함께 영어학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그 학원을 가기 위해 카페에서 문을 나서기 직전에 에스프레소를 마셨는데, 너무 좋았다. 배가 고파도 웬만하면 코, 혀에 남아 있는 에스프레소가 사라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물도 안 마셨다.

참고로 에스프레소 추출과정은 크게 그라인딩 - (도징) - 탬핑 - 추출 - 청소 의 반복이다.

2주째부터 그라인더 사용법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추출을 위한 교육이 시작됐다. 그라인더 사용법은 그렇게 어렵지 않지만, 커피 포터 필터에 정확하게 7.00g 을 담아내기 위한 연습을 3일 넘게는 한 것 같다. 그 다음에 바로 탬핑을 했느냐? 2샷을 한 번에 내릴 수 있은 포터 필터의 사용을 위해 도징을 또 배웠다.
그리고 탬핑. 탬핑은 자칫 잘못하면 손목에 무리를 주게 될 수 있는데 잘못된 자세로 오랫동안 탬핑을 하게 되면 손목을 다치게 된다.
그래서 탬핑을 배울때도 탬핑 한 번 하고 추출 한 번 하는 것이 아니라, 탬핑만 또 며칠을 했다.
그래도 어려서였는지 습득이 빨랐었다.
그 다음, 내가 처음으로 추출한 에스프레소를 맛볼 수 있었다. 그런데 맛이 스승님이 뽑아주신 샷과는 조금 달랐다, 미묘하게.

이후 계속 연습한 끝에 스승님께서도 인정을 하고 바 안의 자리를 몇번 내주고는 하셨다. 손님께 나갈 커피를 내가 추출한 것으로 제공해볼 기회를 주신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경험들이 쌓이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나의 20대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스승님은 “커피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던지셨다.

내가 그 당시 뭐라고 대답했는 지 기억이 나질 않지만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다.
스승님은 “커피는 양심이다”라고 정답을 알려주셨다. 무슨 의미인가 하니, 손님들은 커피를 주문하면 커피가 만들어지는 일련의 과정들을 관심도 없어하거나 관심이 있어도 잘 알지 못해 바리스타가 잘 하는 지 안 하는지 구별하긴 쉽지 않다. 그러나 에스프레소를 추출하는 바리스타, 나 자신은 일련의 과정들 속에서 지켜야 할 것들이 제대로 지켜졌는지는 분명히 알고 있다. 지켜야할 것들 중 한가지라도 지켜지지 않은 샷이 추출되었을 때, 고객에게 제공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 그래서 곧 양심이란 말씀을 하신 것이었다.

참고로 만만히 보이는 커피의 추출과정에서 지켜야할 것들을 “팁”으로 남겨보면,
1. 샷글라스, 제공용 잔은 예열되어 있어야 한다.
2. 항상 깨끗한 주변 환경
3. 매 잔마다 그라인딩부터 시작해야 한다.(미리 그라인딩을 하지 말라)
4. 스팀을 하게 되면, 스팀을 시작하기 전에 식어서 액체가 된 스팀관 속의 물을 빼내야 한다.
5. 그라인딩한 에스프레소는 7.00g 이어야 한다. (이건 바리스타마다 의견이 다르지만 본인이 정한 그램수가 있다면 매번 그 그램으로 일정하게 나와야 한단 얘기)
6. 탭핑과 탬핑을 고르고 정확하게 해야한다.
7. 에스프레소 추출시간이 25초여야 한다. (이것도 바리스타마다 기준치가 다르다. 그러나 한명의 바리스타는 일정한 추출시간을 지켜야 한다.)
8. 추출된 에스프레소 1 잔은 정확하게 1oz여야 한다. (필요에따라 리스트레또, 룽고로 추출할 수 있음)

(이것 말고도 지켜야하는 게 더 많다.)

양심.

지금은 난 개발자로 일하고 있다.

얼마전 동료들과의 점심 식사에서 커피에 대한 얘기가 나와서 “커피는 양심”이란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래서 이 글을 쓰게 되긴 했다.

길게 쓸 필요도 없이 개발자도 자기가 뽑아내는 코드에 대해서 양심을 지켜야할 필요성과 책임감을 날이 가면 갈수록 더 무겁게 느껴진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알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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